인생
30대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인생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20대까지의 나의 모습을 훑어보면 단순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30대의 내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에서 30대까지의 일반적일 수 있는 패턴의 생애를 훑어보려 한다.
2020년대에는 초등학생들이 엄청나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 청담동의 어떤 학생들은 500만 원에 해당하는 영어 학원비를 내어가며 특정한 영어 학원에 합격하기 위해 또 다른 학원을 다니고, 영어 학원뿐만 아니라 5~10개의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도 있다. 그 초등학생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할까? 좋은 중학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좋은 중학교에 갔다면 또 그들은 왜 열심히 공부를 할까? 좋은 특목고 혹은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들어간 학생들은 또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좋은 대학에서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거의 20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 좋은 직장은 왜 들어가고 싶어 할까? 좋은 연봉을 얻기 위해서? 좋은 연봉은 왜 얻고 싶을까? 살기가 편해져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은 왜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왜 대다수 돈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존경에 포커스가 맞춰 있을까? 그 뒤에 가정을 꾸린다면 그 아이들이 또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하는 이유는 도돌이표와 같이 또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꾸리기 위함일 것이다. 이러한 삶은 끊임없는 도돌이표의 인생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좋음을 쫓는 이유는 좋은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만일까? 그 좋음의 정의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다수가 돈에 직결될 가능성도 크다. 그 좋음을 왜 추구할까?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행복해 보이니까?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러한 좋음이 없는 상태를 피하려고 그렇게 쫓는 것은 아닐까?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방어기제들 때문에 우리는 그 도돌이표 인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중에서 우리가 얻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고 있는 것들은 없을까?
좋은 중학교를 가기 위해 초등학생 때 누릴 수 있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는 여유들, 혹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잃고 있진 않은가.
좋은 고등학교를 위해 자유와 우정을 잃고 있진 않은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앎의 기쁨과 창의성을 잃고 있진 않은가.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청춘과 낭만을 잃고 있진 않은가.
좋은 연봉을 얻기 위해 건강과 인간성을 잃고 있진 않은가.
모든 과정 중에서 얼만큼 얻고 얼만큼 잃고 있는가.
지금의 나는 무엇을 향해 무엇을 얻어가고 있으며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결국 인생의 끝에 무엇을 남기기 위해 오늘도 살아가는 것인가.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을 위함인가.
나는 다행히 초등학교 때 좋은 중학교를 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냥 자랐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나도 도돌이표와 같은 과정에 들어갔었고, 그 안에서 정해진 목표들을 따라갔을 때에는 공부를 하면서 배움에 대해, 앎에 대해 재미를 느낄 때가 있었지만 결국은 성적이 나왔을 때 그 점수에 따라 좌절하고 우쭐하곤 했다. 그리고 1등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각 단계들을 지났을 때 나는 내 목표가 내가 세운 것이며 내가 그것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흘렀을 때에는 전혀 내가 알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두려웠던 것이다. 좋음을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의 불행함들이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고, 그러한 방어 기제들로 나는 좋음을 추구했던 것이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없고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좋은 연봉을 얻지 못할 것이고 좋은 연봉이 없다면 큰 불행이 닥쳐올 것만 같았다. 행복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기보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이 고통스럽기 싫었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여행 혹은 봉사활동을 하다 보면 나보다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보고 경험하게 된다.
전쟁 중인 나라에 사는 아이들.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에 사는 아이들.
지독한 병에 걸려 있는 아이들.
나의 두려움들은 그들만큼의 두려움도 아니었고, 그 작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열심히 삶을 지내며 좋음을 쫓으려 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극한의 상황이 아닌 먹고살 만한 여유로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두려움에 쫓겼던 인생은 겁쟁이와 같은 부끄러움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러한 고민들은 사실 인생이라는 강인하고도 큰 개념 앞에서 작은 어리광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 본질을 관통하지 못하고 겉도는 질문들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결국 인생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는 인생의 의미 혹은 가치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좋음”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했고, 그 새로운 “좋음”의 개념이 결코 어설픈 도돌이표의 과정으로 가는 것이 아니어야 했다. 나에게 있어서 인생은 아직까지도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인생이 결국 종교와 결부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가족”이라는 개념과 함께 오게 되었다.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내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살게 해주는 이유가 있음을 믿고, 그 이유를 깨달을 때 내가 준비되어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날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한 것이 나에게 있어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 혹은 가치와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